[소셜임팩트본드 매거진 2019년 3·4월호]

 

동양인에 대한 편견

수년 전 사회적금융·임팩트투자 발전에 기여를 한 해외 인사를 국내에 초청한 일이 있었다. 이 업계에서 여러 활동을 한 분이라 배울 게 많았고, 나도 그 기회에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첫 날의 일정을 마치고 내가 전해들은 이야기는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영어실력이 유창한 우리 직원이 “해외에서 좋은 선례들을 만들어 우리나라도 이를 배우고 새로운 일들을 할 수 있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자, 그분이 짧게 “That’s Asian”, 즉 “그게 아시아 사람이다”라고 답변한 것이다. 악의는 없었겠지만 무의식중에 동양인에 대한 선입견을 드러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아시아인이라는 인종적 구분을 한 것을 볼 때 서양인이 무엇인가를 만들면 동양인은 이를 따라한다는 편견을 보인 것이다.

나는 처음 이 이야기를 듣고는 “덕담을 했더니 기껏 하는 말이 그게 뭐냐”는 심정에 기분이 상했지만, 이후 차분하게 생각을 하자 그러한 편견이 발생한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편견이 아니라 근거 있는 사실을 말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

생각해 보니 사회적금융, 사회적경제, 지속가능성, 임팩트투자, 사회적 가치 등의 개념은 모두 서양에서 만들어진 것들이고, 아시아는 이를 배워서 응용하는 입장에 있다. 그리고 이뿐 아니라 거의 모든 분야가 이와 같다.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입법·행정·사법 체계와 정치체제부터 서양의 것들이다. 의회 제도는 물론 많은 사람들이 신념처럼 여기는 진보·보수 또는 좌·우의 정치적 구분,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도 실은 서양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대부분의 학문과 대학 학제 시스템도 서양의 것이며, 상업과 금융의 수단, 의복, 교통, 건축양식 모두 서양의 발명품들이다. 외모마저도 서구적인 것을 선호하고 닮고자 노력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이러한 예들을 열거하면 책을 한 권 쓸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렇다보니 서양인의 눈으로 볼 때 동양인들은 자신들을 열심히 따라하는 것으로 보일만도 하다. 입장을 바꾸어보면 선입견이 안 생기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만 같았다.

 

한국에서 첫 SIB 아이디어가 나왔다면

처음 SIB를 알리기 위해 고생할 때 꽤 많이 들었던 질문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해외 사례가 있는가?”, “외국 어느 나라가 하고 있는가?”, “선진국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등 등. 해외 사례가 있어야만 한 번이라도 들어주고 옳은 것으로 여기는 우리만의 편견 때문에 해외 사례를 제시할 때와 제시하지 않을 때 반응의 차이가 현격하게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선진국 콤플렉스와 선진국의 후광효과가 어우러져 서구 사례 의존성이 생긴 것이다.

선진 사례를 배우는 것은 더 나은 결과를 만들기에 적합하다면 바람직한 일이기 때문에 이것이 잘못된 방법은 아니다. 나도 해외 사례를 학습하고, 이를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에 유용하게 활용한다. 올바로 응용하기 위해서라도 좋은 사례들은 제대로 학습해야 한다. 다행히도 SIB의 경우 좋은 선례들이 존재할 뿐 아니라, 우리의 필요에도 맞고, 합리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는 방법론이다.

그러나 생각건대 SIB와 같은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한국에서 처음 나왔다면 과연 실현이 되었을까? 아마도 실현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선진 사례가 있어서 이를 적극 활용해도 온갖 장애물로 힘겨웠는데, 만약 그마저도 없이 이처럼 생소하고 복잡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면 들어주는 사람도 거의 없고, 설득도 불가능했을 것 같다.

 

큰 임팩트의 기회

우리보다 앞서 있는 것, 옳은 것은 적극적으로 배우고 수용해야 우리도 발전한다. 그러나 시비와 필요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서구 사례 유무에 좌우되는 사고방식은 비합리적이다. 이러한 사고에 길들여지면 해외의 잘못된 것들마저도 옳은 것으로 둔갑해 버리게 되고, 우리만의 세계적인 혁신이나 패러다임의 전환도 일어나기 힘들다.

무엇보다 이러한 습관은 객관적 판단을 어렵게 만든다. 우리의 현실과 필요를 조망한 뒤, 올바르고 합리적이라면 새로운 것이라도 시작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습관은 이러한 시도를 방해한다. 이전에 없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아이디어는 의존성보다 합리성과 진취성이 있어야 만들어진다.

우리는 SIB, 임팩트투자, 지속가능성, 사회적 가치 등 꽤 많은 훌륭한 개념들을 외국으로부터 배워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개념들이 우리 사회 뿐 아니라 인류와 지구를 위한 일이라면 우리가 배워서 덕을 본 것 이상으로 우리도 세상을 위해 환원해야 할 것이다.

현재 우리 임팩트투자 시장은 서구 사례를 쫓아가는 데에 급급한 실정이지만, 이러한 경험 속에서 언젠가 우리나라가 창의력을 발휘하여 더 나은 변화의 원천을 만드는 기회를 포착하였으면 좋겠다. 거기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큰 임팩트가 나올 것이다. “그래서 해외 사례가 뭔데?”와 같은 말을 안 듣고도, SIB와 같은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에 우리가 첫 발을 떼는 일들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작성 : 곽제훈
팬임팩트코리아

 

[ 지난 글 보기 ]

2019년 1·2월호 : SIB에 대한 기억

Categories: SIB 매거진